손끝에서 피어나는 신세계, 2024 로에베 재단 공예상
2024 로에베 재단 공예상의 우승자로 선정된 멕시코 예술가 안드레스 안자를 필두로 서로 다른 온도와 질감을 타고난 수많은 손이 팔레 드 도쿄에서 맞닿았다. 이들의 손끝에서 공예의 세계가 지켜지고 확장될 것이라는 조나단 앤더슨의 확신은 올해도 굳건하다.
정기 휴무일인 화요일. 프랑스 현대미술관 팔레 드 도쿄는 텅 비어 있었다. 동시대의 가장 도발적인 예술가들에게만 공간을 내주는 팔레 드 도쿄에서 5월 14일부터 6월 9일까지 4주 동안 로에베 재단 공예상 전시를 열었다. 공간 한가운데 설치된 새하얀 시상대를 보며 나는 로에베의 뜨거운 위상을 다시 실감했다. 바로 직전 뉴욕에서 열린 2024 멧 갈라에서도 로에베는 스포트라이트 한가운데 있었다. 공동 의장 안나 윈투어와 테일러 러셀, 아리아나 그란데와 그레타 리를 비롯해 수많은 셀러브리티가 ‘시간의 정원’이라는 드레스 코드에 맞춰 로에베에서 제작한 환상적인 아트 피스를 착용하고 레드 카펫을 누볐다. 축제의 명예 의장으로 활약한 조나단 앤더슨이 시차에 완벽하게 적응할 틈도 없이 이번에는 자신의 눈동자처럼 푸른 워크 재킷을 가볍게 걸친 채 공예가 친구들을 맞이했다.
2016년 시작된 로에베 재단 공예상은 올해 일곱 번째로 시상했다. 1846년 마드리드의 작은 공예 워크숍에서 샘솟은 브랜드 정신을 이어받아 현대 공예의 새로움과 우수성, 예술적 가치를 알리기 위해 탄생했다. 국내에서는 2022년 전통 말총공예의 섬세한 아름다움을 선보인 공예가 정다혜가 우승하며 인지도가 한층 높아지기도 했다. 시상식이 열리기 몇 시간 전 직접 마주한 로에베 재단의 셰일라 로에베(Sheila Loewe)와(그녀는 올해 공예상 심사 위원단에 합류했다) 조나단 앤더슨은 로에베 재단 공예상이 현대 공예의 훌륭한 아카이브이자 아카데미가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첫 번째 공예상 우승자였던 에른스트 감페를(Ernst Gamperl)이 명망 있는 기관에서 개인전을 열고 또 다른 수상자 제니퍼 리(Jennifer Lee)가 영국의 유서 깊은 갤러리 케틀스 야드에서 회고전을 연 것처럼 로에베 재단 공예상은 공예가들의 커리어에 터닝 포인트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많은 사람이 이 상의 영향력을 의식하게 되었죠. 라이징 아티스트부터 원로 작가까지 매년 다양한 세대의 지원자들이 몰리고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입니다. 이것은 로에베 재단 공예상의 아주 긍정적인 전망이죠.” 124개국으로부터 3,900점이 넘는 작품이 출품된 올해 공예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전시장에는 1979년부터 작은 길드에서 바구니를 만들어온 폴리 아담스(Polly Adams)의 섬유 작품 ‘근원’과 한국에 공방 유리공예 운동을 최초로 소개한 김기라 작가의 작품 ‘서 있는 집’이 1990년생 아티스트 사르 스헤이를링스(Saar Scheerlings)가 침대 매트리스 폼을 재활용해 만든 구조물 ‘탈리스만 조각: 기둥’, 그리고 오키 아야(Aya Oki)가 혁신적인 기술로 완성한 유리공예 작품 ‘Bloom IX’과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5명의 한국 작가를 포함한 30명의 최종 후보자 중 한국 작가 김희찬, 일본 작가 아사이 미키(Miki Asai), 프랑스 작가 에마뉘엘 부스(Emmanuel Boos)가 특별상을 수상했고, 멕시코 아티스트 안드레스 안자(Andrés Anza)가 최종 우승자로 선정됐다. 다소 얼떨떨한 표정으로 우승자 인터뷰에 참석한 그는 자신의 친근한 작품을 소개하며 숨을 골랐다. 거대한 토템 오브제 표면에 수천 개의 작고 뾰족한 돌기가 박힌 실물 크기의 도자 작품 ‘나는 내가 본 것만 알아’는 이번 공예상을 위해 제작한 회심의 작품이었다. 심사 위원들은 구상적인 동시에 추상적이고, 동식물을 동시에 연상케 하는 이 작품의 역동성에 특히 감탄했다. “익숙하게 느껴지면서도 낯선 형태를 띠고 있죠. 그게 무엇이든 간에 저는 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만드는 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움직임을 느끼게 하는 요소, 그래서 조각상을 동적으로 느끼게 하는 요소를 좋아하죠.” 구글에 그의 이름을 검색하자 솟아오르거나 흘러내리고, 잔뜩 웅크린 그의 형형색색 토템이 나타났다. 그와 동시에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것이 과연 공예인가?’
이는 지난밤 열린 환영 파티에서도 내내 떠돌던 화두였다. 공예란 무엇이며, 공예의 아름다움은 무엇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2024 로에베 재단 공예상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공예상 후보 작가들, 기자와 평론가들, 로에베 관계자들의 이야기는 전부 제각각이었다. 공예에서는 멋과 실용성이 동등하게 중요하다는 느슨한 가치관을 지닌 내게도 생각의 전환이 요구되었다. 말린 소 내장(소장)을 푸른 염료로 물들이고 깃털 형태로 잘라서 연결해 만든 목걸이 ‘파랑새의 날개’를 선보인 전은미 작가는 실용성의 한계를 넘어 오브제로서 가치를 폭넓게 인정하는 로에베의 시선을 흥미로워했다. 재활용 목재로 만든 테이블 ‘원시구조’를 출품한 원 리(Weon Rhee, 이종원) 작가는 새로운 재료에 대한 호기심이 남달랐다. “PSL 빔이라는 재활용 목재를 쓰는 것, 목재를 염색하는 것 모두 학부생 시절부터 주변에서 많이 반대했어요. 하지만 남들이 기피하는 재료를 쓰는 희열이 있더라고요.” 시상식 애프터 파티에서 비로소 마주한 특별상 수상자 김희찬 작가는 조선 기술에서 착안한 기법으로 물푸레나무를 휘고 구리철사로 연결해 완성한 작품 ‘#16’을 소개하며 공예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를 밝혔다. “공예는 재료의 연장입니다. 작업하며 나무를 만지다 보면 이 나무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싶어 하는지 알 수 있어요. 저는 그런 나무 본연의 의지를 이어가는 방식으로 손을 움직이죠. 서양에서는 자연을 재구성하는 방식을 즐기는 반면 동양에서는 자연에 주체성을 부여하는 방식을 선호하는 것 같기도 해요.”
로에베의 공식 입장에 따르면 올해 공예상에서는 많은 작품이 새롭거나 재활용한 재료를 활용해 기존 용도를 변경하고, 고무 타이어나 압축목재처럼 전통 공예에서 환영받지 못한 일상적인 재료의 고도화와 변형에 초점을 맞췄다. 전문가 패널의 사무총장 아나추 자발베아스코아(Anatxu Zabalbeascoa)는 “공예상을 통해 로에베는 재활용 재료로 만든 작품을 비롯해 공예의 경계를 계속 확장해나가고 있다”며 공예상의 의의를 두둔했다. 첫 심사를 즐겁게 마친 건축가 조민석 역시 공예에 대한 로에베의 진정성을 강조하며 더 친절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려줬다. “20세기에 들어서며 공예의 영역은 점점 축소돼온 것이 사실이에요. 뉴욕에서 공예 박물관이 사라졌고, MoMA가 확장하며 아트 앤 디자인 뮤지엄이 들어섰는데 거기에 공예는 제외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죠.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전통 회화와 디지털 아트, 디자인, 건축, 패션 등에 조금씩 맞닿아 있던 공예의 영역을 확장해 공예 중심의 세계관을 펼치려는 로에베의 노력에 공감이 가더군요. 전통 공예의 정수를 보여주는 전시와 시상식은 세계적으로 너무 많잖아요. 로에베는 자꾸 안쪽을 향하던 공예계의 시선을 뒤집어 공예의 세계를 지키고 확장하길 원해요.”
원시적인 아름다움을 품은 것부터 다목적성과 다용도성을 자랑하는 생경한 오브제까지, 인간의 손끝에서 탄생한 모든 것이 조나단 앤더슨에겐 공예다. “공예란 만드는 것입니다. 자수, 깃털 달기, 테일러링, 가죽 세공··· 패션에 얽힌 모든 과정 역시 저에겐 공예로 느껴집니다. 로에베만큼 공예에 대해 이토록 복합적이고 폭넓은 시선으로 접근하는 브랜드는 많지 않을 겁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사명이 “공예를 지키는 것”이라 말하는 그의 음성에서 한 치의 망설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로에베에 합류하기 전부터 저는 세라믹과 텍스타일을 즐겨 수집하곤 했습니다. 덕분에 주변에 훌륭한 공예가와 세라미스트, 텍스타일 아티스트 친구들이 참 많았죠. 하지만 훌륭한 미학과 기술을 지녔음에도 이들의 세상을 지켜줄 마케팅과 플랫폼이 부재하다는 사실이 늘 안타까웠습니다.” 조나단 앤더슨은 공예상이 충실한 다리(Bridge)가 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 문화와 취향에 머물던 공예가들이 모여 서로의 작업에서 영감을 받고 그러면서 공예의 외연이 자연스럽게 확장되는 것. 이는 맨 처음 로에베 공예상을 구상할 당시 그가 막연히 꿈꾸던 광경이었다. “1920~1930년대 영국의 세인트아이브스를 자주 떠올렸어요.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조각가 바버라 헵워스, 화가 몬드리안과 벤 니콜슨, 배우 그레타 가르보 등 수많은 예술가가 뜨겁게 교류하며 멜팅 포트를 이룬 곳이죠. 그런 강렬한 도가니 속에서 탄생하는 크리에이티비티, 그런 것을 일으키고 싶었습니다. 엘사 스키아파렐리가 자코메티와 함께 버튼을 만들었다면 어땠을까요? 자유분방한 분위기에서 삶과 예술을 치열하게 논하는 예술가들이 함께 패션쇼를 열고, 온갖 창의적인 일을 벌이던 그 시대의 풍경이 로에베 공예상을 통해 무궁무진하게 재현되길 바랍니다.” 일찍이 베니스 비엔날레를 통해 소중한 인연을 얻은 경험이 있는 조민석 건축가가 시상식이 끝나고 전시장 한쪽에 모인 5명의 한국 작가들에게 다가가 건넨 말 역시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로에베를 통해 이어진 새로운 인연이 앞으로 10년, 20년, 계속 이어질 겁니다. 세계적으로 실력을 인정받은 예술가들끼리 만나 서로 자극을 받고 응원도 나누면서 그렇게 공예의 생태계도 확장해가는 거죠.” (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