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트홈’의 마지막 순간, 완벽한 해피엔드
모든 것이 끝났다. 이야기의 끝을 마주한 <스위트홈> 시즌 3의 주역들이 고개를 들어 상기했다. 이 마지막 순간의 의미에 대하여.
신대륙 발견, 이진욱
“편상욱? 남상원? 정의명? 뭐라고 소개해야 하죠?(웃음)” <보그> 디지털 콘텐츠 촬영을 위해 이진욱, 이시영, 고민시, 진영, 유오성, 김시아(김무열과 오정세는 일정상 화보 촬영만 함께 했다)가 모여 앉은 가운데, 배역 소개를 요청받은 이진욱이 난색을 표했다. 괴물화 현상으로 인해 디스토피아를 맞이한 <스위트홈>에서 맨 처음 살인 청부업자 편상욱으로 등장한 그는 이후 강력한 신체를 원하는 정의명(김성철)에게 몸을 내줬다가 시즌 3에서는 임 박사(오정세)의 첫 번째 특수 감염 실험체였던 남상원(이신성)이 된다. 다양한 육신과 영혼, 신념을 덧입으며 세 시즌을 관통해온 그는 명실상부 이 시리즈의 주역이자 선후배 출연진을 연결하는 구심점이다. 게다가 분위기 메이커다. 매니시한 드리스 반 노튼의 올 블랙 룩으로 기분 좋게 <보그> 촬영 스타트를 끊은 이진욱은 격의 없이 촬영장을 누비며 선배 유오성에겐 따뜻한 존중을, 소속사 후배 김시아에게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보였다. <스위트홈> 촬영 내내 그런 이진욱의 존재감은 이응복 감독에게도 더없이 든든하지 않았을까. 물론 이진욱 또한 <스위트홈>이 고맙다. “터닝 포인트 같은 작품이에요. 처음 역할을 제안받을 때 감독님께 ‘좀 안 어울리지 않나요?’라고 했을 만큼 사실 원작이나 시나리오를 보면 결코 저를 떠올릴 수 없는 역할이거든요. 그런데 결국 ‘괜찮네’라는 말을 들으니까 힘이 나더라고요. 이 작품으로 다시 가능성을 인정받은 느낌이에요. 더 기분 좋은 건 다른 출연진도 <스위트홈>에서 가능성을 입증했다는 사실이죠.” 그의 말대로다. 4년 전 연말,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공개된 <스위트홈> 시즌 1에서 새로운 얼굴로 이목을 끌었던 송강, 이도현, 고민시, 박규영은 어느새 작품 전체를 견인하는 이름이 됐으니까. “다들 배우로서 좋은 모습 보여주고 있으니까 제가 키운 건 아니지만 뿌듯하죠.(웃음)” 이진욱의 연기는 20년에 가까운 경력이 안겨준 당연한 성과가 결코 아니며, 남다른 호기심과 학구열로 계발된 측면도 있다. <스위트홈>을 준비하면서 그는 일본 애니메이션<기생수>(1988)와 국내 리메이크작 <기생수: 더 그레이>(2024) 등을 참고해 배역을 연구했다. “관심사가 너무 많아요. 제 인생 모토가 ‘죽기 직전까지 최대한 많이 경험하고 느끼자’예요. 연기하는 데도 그런 호기심이 많은 도움을 주긴 하지만··· 너무 관심사가 다양해서 오히려 사람들이 한 번에 떠올리는 나만의 색깔이 없나 싶기도 해요.” 탁월한 자기 객관화 역시 이진욱이 지닌 강점 중 하나다. 덕분에 그는 과도한 욕망 때문에 스스로를 필요 이상으로 몰아붙인 적도, 부러움과 불안에 매몰된 적도 없이 행복한 배우로 살아왔다. 욕망으로 인해 괴물로 변하는 <스위트홈>의 이야기가 현실에서 펼쳐진다면 이진욱은 그런 세상에서 끝내 괴물로 변하지 않을 한 사람이다. 특별히 두려운 것 없는 그가 그나마 가장 신경 쓰는 지점은 건강. “운동 열심히 하고, 좋은 것 먹고, 그 두 가지만 잘해도 후천적 질병은 많이 줄일 수 있대요. 죽는 건 괜찮은데, 건강하지 않은 건 두렵거든요. 다른 욕심은 없어요.”
후회 없는 막판 스퍼트, 이시영
<스위트홈> 시즌 1이 공개됐을 때 사람들은 이시영의 탄탄한 등 근육을 보고 제일 먼저 놀랐다. 헬스와 복싱 등 다양한 운동으로 긴 시간 몸을 다져온 그녀에게 특전사 출신의 소방관 서이경이라는 몸에 꼭 맞는 역할이 주어졌고, 운동할 때 각오를 다지듯이 그녀는 붙잡은 기회를 성실하게 수행하겠다고 결심했다. “작품을 위해 몸을 만드는 건 마냥 즐거워요. 목표가 생기면 달려갈 수 있으니까요.” 대화 상대가 운동선수가 아니라 배우라는 사실을 상기하려는 찰나, 그녀가 이번에는 고충을 늘어놓았다. “시즌 2와 3에서는 서이경이 1년 내내 민소매 차림으로 등장하거든요.(웃음) 시즌 1처럼 피부를 바짝 말린 채로 그렇게 긴 시간 버틸 순 없으니 그냥 벌크업으로 몸을 키워야겠다는 판단이 서더라고요.” 그러나 이시영이 부여받은 미션은 더 있었다. 그녀가 감내해야 할 감정선이 서사가 깊어질수록 한층 까다로워졌기 때문이다. 시즌 2에서 남편의 비극적 죽음을 목격한 후 차디찬 빙판 위에서 산고를 겪은 서이경은 괴물로 태어난 ‘아이(김시아)’와 위태롭게 동행하며 분노와 죄책감, 증오, 두려움, 모성애가 온통 뒤섞인 혼란스러운 감정으로 괴로워한 끝에 자신도 괴물이 된다. “서이경은 <스위트홈>의 모든 인물 중 가장 슬픈 서사를 가진 인물 아닐까요? 갖은 애를 썼음에도 결국 내 아이가 괴물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 아이가 다른 누군가를 해치지 않도록 극도로 통제했고, 아이를 원망하고 부정하며 자신 역시 망가져 갔죠. 그런 이경을 연기하며 깊은 연민을 느꼈습니다. 아이가 내게 주는 행복이 얼마나 큰지 엄마가 되면 어떤 삶이 열리는지 이젠 너무도 잘 알기에··· 그 행복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경과 아이가 참 불쌍했어요.” 실제로 이응복 감독은 일곱 살 아이 엄마인 이시영에게 자주 의견을 물으며 그녀만의 캐릭터를 구축할 기회를 주었다. 2008년 드라마 <도시괴담 데쟈뷰> 시즌 3로 데뷔하고, <꽃보다 남자>(2009)와 <남자사용설명서>(2013)로 확고한 개성을 알린 그녀에게 <스위트홈>은 행운처럼 찾아왔다. “이응복 감독님께서 촬영하기 전에 항상 ‘너라면 어떨 것 같아?’ ‘넌 어떻게 하고 싶어?’라는 질문을 건네셨어요. 그런 대화를 통해 이경의 서사가 바뀐 부분도 있어요. 아이와의 관계나 감정이 훨씬 깊어졌죠.”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이야기에 긴장감을 드리우는 배우 김시아는 실제 촬영장에서는 이시영의 숨통을 틔워준 존재다. “시아와의 촬영은 말할 것도 없이 너무 좋았죠. 그렇게 순수한 사람을 보고 있으니 크리처물을 찍는 현장에서도 힐링이 됐어요.” 이시영은 ‘아주 조금이라도 누를 끼치지 않겠다’는 각오로 촬영 마지막까지 열의를 바쳤다. “받은 게 아주 많은 작품이니까요. 제 목표가 ‘항상 행복하자’거든요.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할 때 힘을 얻고,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또 힘을 얻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음에 힘을 얻으며 남은 삶도 긍정적으로 살고 싶어요.” 낯선 배역을 만나는 일, 정답을 찾기 힘든 좋은 엄마가 되는 일, 여전히 많은 것이 두렵지만 지난번보다 아주 조금 더 잘해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으로 이시영이 또다시 몸을 일으킨다.
찬란하게 물든 20대, 고민시
비가 쏟아지는 <보그> 촬영장, 새파란 물감을 퍼뜨린 차가운 욕조 안에 고민시가 성큼 들어선다. 주어진 기회 앞에 주저하는 법은 없다. <스위트홈>에서 보여준 당돌한 모습 그대로 거침없이 카메라를 응시한다. <스위트홈>에서 이은유를 연기한 고민시는 눈빛으로 많은 것을 이야기했다. 결코 죽지 않았을 거라 믿는 오빠 이은혁(이도현)에 대한 그리움, 악인에 대한 분노,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황망함, 이대로는 죽지 않겠다는 반항심까지. 시즌을 거듭하며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따갑게 구는 철없는 여고생에서 흐름을 반전시키는 여전사로 성장한 이은유를 연기하며 고민시는 100%의 애정과 몰입도를 갖고 임했다. “시간이 갈수록 단단해지는 은유를 연기할 수 있어 좋았어요. 지켜내고 싶은 것은 끝까지 지키려는 굳센 의지와 믿음, 편견 없는 시선이 특히 매력적이었죠. 그런 은유처럼 저도 스스로를 단단하게 단련해서 더 좋은 배우가 되자고 다짐했어요.” <보그> 촬영을 함께 한 8인의 배우는 물론 지 반장(김신록)의 가족과 베드로(김정우), 왕호상(현봉식)과 하니(채원빈), 까마귀부대원 등 수많은 인물이 개성 가득한 연기를 겨룬 현장은 치열한 배움터와 다름없었다. “짧지만 함께 연기하며 느낀 선배님들의 에너지와 힘이 정말 강렬했어요. ‘슛’ 하자마자 순식간에 눈빛을 바꿔서 집중하던 김신록 선배님과 예전에 단막극 <잊혀진 계절>에서 즐겁게 호흡을 주고받았던 (김)무열 선배님과의 만남이 특히 기억에 남아요. 잔뜩 집약된 에너지로 함께 호흡하는 그 느낌이 정말 행복했습니다.” 뜨거운 여름, 그린홈 아파트 옥상에서 촬영한 시즌 1의 첫 장면을 여전히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하는 고민시는 아직 <스위트홈>을 떠나보낼 준비가 안 됐다. “저의 20대는 온통 <스위트홈>이었거든요. 필모그래피 중 가장 세계관이 넓고, 또래 배우들과의 소통도 가장 많았던 작품이에요. 나중에는 감독님, 출연진과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순간이 많았죠.” 현재 방영 중인 <서진이네 2>에서 보여주는 곰살맞고 똑 부러지는 모습처럼 고민시는 새로운 상황과 관계 속에 금세 스며들며 자신의 세계를 넓혀왔다. 남매로 등장한 이도현 배우와는 이후 <오월의 청춘>(2021)에서 연인으로 만나 함께 시대극을 이끌었고, 상업 영화 첫 주연을 맡은 영화 <밀수>(2023)에서는 김혜수, 염정아 배우 사이에서 마음껏 뛰놀았다. “현장에서 연기하고 일할 때가 제일 행복해요. 쉬면 안 되는 타입인가 봐요. 쉬는 기간이 일주일을 넘어가면 생각이 너무 많아지고 우울해져요.” <스위트홈>을 통해 얻은 가장 큰 수확은 배우의 삶에 대한 확신 아닐까. 그러나 영리한 배우이기도 한 고민시는 사소하지만 소중한 일상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도 최선을 다한다. “엄마가 해주던 반찬을 먹으면 어릴 때로 돌아간 것 같아요. 봄에는 달래무침과 냉이 된장찌개, 여름에는 노각무침, 가을에는 무나물, 겨울에는 굴이 들어간 배추김치··· 사소한 순간에서 그런 향수를 느낄 때 제가 아직 순수한 것 같아요. 살면서 맞닥뜨린 수많은 감정과 기억, 경험 덕분에 지금처럼 연기한다고 믿기에 앞으로도 그런 소중한 자산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할 거예요.”
또 한 조각의 자신감, 진영
진영은 촬영장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입버릇처럼 한다. “잘될 거야.” “좋은 일이 생길 건가 봐.” <스위트홈>에서 애정과 우정을 오가는 알쏭달쏭한 관계로 엮인 고민시는 진영을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착한 사람”으로 소개했다. 이진욱도 한마디 거든다. “귀중품을 맡겨도 안심이 되는 사람.” 그러고 보니 앉아 있는 자세도 바르다. <스위트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박찬영이라는 역할을 어떻게 연기할지 고민하던 때, 이응복 감독이 “박찬영은 너와 상당히 비슷하니 있는 그대로 연기하면 된다”고 말했다는 데 수긍이 갔다. 괴물화 시대가 도래한 후 야구 유망주에서 스타디움 사람들을 지키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은 박찬영은 순수한 원칙주의자다. 괴물화 사태 속에서 기존 정의와 질서가 무너질 때조차 그는 “생존자들에게 스타디움은 마지막 보금자리야. 그걸 지키는 게 수호대 임무고”라고 말하며 직업 정신을 발휘하고, 호감을 지닌 상대라도 지킬 수 없는 약속은 못하는 올곧은 인물이다.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남을 지키고 자신의 임무를 어떻게든 완수해내는 사명감을 갖기는 쉽지 않죠. 연구하고 연기할수록 멋있는 인물이었고, 그 정의로운 면을 시청자에게 전달하고 싶었어요.” 고심하는 목소리에서 풋풋함이 어른거렸지만 사실 진영은 배우로 데뷔한 지 10년이 넘었다. 2016년엔 <구르미 그린 달빛>으로 KBS 연기대상 신인상을 수상했다. “대사 한 줄 없는 보조 출연으로 시작했고, 뒷모습만 나오는 장면인데도 통편집된 적 있어요. 대사가 한 줄씩 길어지는 것에 희망을 갖고 더 노력했죠.” <보그> 촬영이 시작되고, 새하얀 코트를 입은 진영이 <스위트홈>에서 보여준 건장한 군인과는 상반되는 모습으로 등장했다. 오랜만에 B1A4 리더이자 메인 프로듀서의 아우라가 느껴졌다. “어릴 때부터 연예계 생활을 하면서 뭔가를 원할 때마다 현실적으로 돌아봤어요. 그렇게 마인드 컨트롤 하는 법을 배웠고, 충동과 욕구를 절제했죠.” 그렇다고 항상 초연하진 않았다. <스위트홈> 시즌 2 공개 당시 진영은 제작진만큼 작품에 대한 반응을 면밀히 살폈다. 흔들리는 순간도 많았다. <스위트홈> 첫 촬영에 임할 땐 설렘과 긴장감이 그를 휘감았고, 시즌 3에서 차현수(송강)와 서이경(이시영)을 구하기 위해 실제 불길 속으로 뛰어들 땐 무서웠다. 그러나 모든 여정이 끝난 후에 ‘나도 많이 해낼 수 있는 사람이구나’라는 자신감이 찾아왔다. “<스위트홈>으로 인해 한 단계 더 나아간 것 같아 만족스러워요. 또 다른 도전을 통해 긍정적인 에너지를 준 작품으로 오래오래 기억하겠죠.” 진영은 행복한 배우가 되고 싶다.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은 사실 많아요. 하는 일이 잘돼도 행복하고, 팬들과 이야기하고 응원을 받는 것도 행복하죠. 이런 조각이 모여서 행복한 배우가 될 거라 믿어요.”
기분 좋은 책임감, 유오성
“30년째 배우로 살아오면서 이렇게 메이저 작품에 참여한 건 처음입니다.” 1년 전 열린 <스위트홈> 시즌 2 제작 보고회에서 유오성이 한 말이다. 포근한 블랙 니트를 입고 그 말을 하는 유오성의 눈은 진중하고 따뜻했다. 처음에는 몰랐다. 캐스팅 제의를 받을 때까지만 해도 <스위트홈>을 보지 못한 그에게 ‘요즘 최고 히트작’이라고 귀띔한 아들이 아니었다면 유오성 버전의 탁인환은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장화 신은 고양이 같은 눈빛으로’ 유오성을 설득한 이응복∙박소현 감독의 진심도 귀했다. 그렇게 자석처럼 이끌려 <스위트홈>을 정주행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외로운 까마귀부대를 이끄는 ‘탁 상사’가 되어 있었다. 국가 질서가 철저히 붕괴된 후 체제의 선봉에 섰던 특수부대에서 새로운 공동체의 리더로 거듭난 그에게서 많은 사람이 강렬한 카리스마를 느꼈으나 관록 있는 배우 유오성은 곧바로 탁인환이 지닌 연약함을 감지했다. “자기 자식을 죽인 것에 대한 뼈아픈 기억을 가진 인물이죠. 명령을 내리기는 하지만 고민이 아주 많고요. 저는 탁인환이 우유부단하다고 느꼈어요. 그걸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 소대장으로서 민간인을 보호하는 사명에 집중하는 거였을 테죠. 물론 그런 사명에도 불구하고 괴물화를 겪으면서 내적 갈등을 끝없이 겪게 되지만요.” 사실 극 중에서 탁인환은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긴장감 있는 조명 아래 고요하게 거울 속 자신을 응시하는 탁인환은 온갖 신기술이 집약된 최신 SF물이 아니라 연극 무대를 보는 듯한 장면을 연출한다. “대사를 최대한 함축적으로 줄이고픈 욕심이 있어요. 말 대신 표정이나 카리스마를 활용해 얘기하고자 하는 바를 드러내는 연기에 관심이 많고요. 그래서인지 <웰컴투 삼달리>(2023)를 찍을 때 차영훈 감독님도 ‘형은 왜 자꾸 대사를 줄이냐’고 하더군요.(웃음)” 어쨌거나 연기에 대한 배우의 끈질긴 고민으로 덕을 보는 것은 관객인 우리다. 복합적인 인간 군상으로 인해 한층 풍성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으니까. 1992년 연극 <핏줄>로 데뷔한 유오성의 연기 여정은 그런 ‘다 함께’의 중요성을 깨달아가는 시간이었다. “스물일곱에 사회생활을 시작했어요. 꾸준히 한길을 걸어왔죠. 그로부터 다시 27년 후, 드라마 <검은태양>(2021)과 영화 <강릉>(2021)을 만나고, <스위트홈>에 이르렀습니다. 개인적으로 이제는 극의 중심에 서기보다는 서브텍스트를 풍성하게 하는 역할을 잘해내야 하는 시점이라고 봐요. 요즘은 내 연기에 대해 상대가 리액션을 잘했을 때 좋은 연기를 해냈다고 느낍니다.” 쓰임받는다는 것 역시 기분 좋은 일이다. <스위트홈>에서 대사 한 줄을 위해 하루를 기다리는 수많은 후배에게 유오성은 그 동등한 크기의 쓰임에 관해 자주 이야기했다. “수호대원 중 한 명으로 나오는 배우가 있어요. 대사도 별로 없고 심심하죠. 그 친구가 ‘주인공은 선배님이시죠’ 하길래 이 작품에서 네 역할을 연기하는 건 네가 유일하니 나처럼 너도 똑같이 주인공이라고 해줬어요. 그러니 현장에서 너무 쭈뼛대지 말라고요. 존재로서 당당해져야 함께 쟁쟁하게 연기할 수 있다고요.” 그가 감탄했듯이 <스위트홈>은 세 시즌을 통해 갈무리되는 대작이다. 이야기부터 캐스팅, 제작 환경과 방식 등 모든 것이 거대하고 견고한 시스템 속으로 흡수된다. 점점 더 촘촘해지는 세계에서 여전히 혈혈단신으로 무대 한가운데 서는 배우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까. “완벽하게 짜인 앙상블 안에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결국 자기가 공부하는 방법밖에 없어요. 타고난 개성으로만 밀어붙이지 않고 여러 방식과 표현법을 공부해야죠. 가진 재료를 계속 숙성시키는 것. 그렇게 자유로운 배우가 됩니다.”
만족스러운 경유지, 김무열
맨 처음 <스위트홈>에 대한 질문을 쏟아냈을 때 김무열은 여러 번 움찔했다. 저편의 기억을 끌어와야 했기 때문이다. 질문을 건네는 나 역시 <스위트홈>의 김영후 중사보다는 최근 <범죄도시 4>에서 목격한 백창기의 냉혹한 인상에 머물러 있었다. “고생한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니까 좋았던 기억만 남는군요.”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은 외로운 세계에서 동고동락한 부대원들이다. “민서진 역할의 정석원 배우, 강석찬을 연기한 허남준 배우, 이 친구들과 같이 촬영하고 밥 먹고 하는 게 재미있었어요. 시즌 2 마지막에 부대원들이 희생당한 후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졌는데, 그때 되게 보고 싶더라고요.” <스위트홈> 시즌 2에서 처음 등장할 때만 해도 아슬아슬한 냉기를 연신 뿜어대던 김영후는 시간이 갈수록 동료애를 발휘하며 조금씩 온기를 얻어간다. 흐름을 탄 기억이 조금씩 되살아나며 김무열의 말에 속도감이 더해졌다. “부대원들을 잃은 후 동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괴물과 싸우며 총을 연사하고 주먹질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즉흥적으로 부대원들 이름을 부르게 되더라고요. 다행히 감독님이 애드리브를 흔쾌히 받아주셨죠. 배우로서 그럴 때 희열을 느껴요. 캐릭터에 걸맞은 연기와 개인적으로 해석한 연기가 맞물리면서 시너지가 폭발하는 순간이요.” 뮤지컬 배우로 커리어를 시작해 다채로운 장르와 역할에서 골고루 활약한 그의 이력을 보면 느껴지듯 김무열은 고민이 많은 배우다. “답답할 때는 떠오르는 걸 써보기도 하고, 인상 깊게 본 연기 장면을 찾아보기도 하고, 현장에서 다른 배우들의 연기를 유심히 보기도 해요. 배우의 숙명 같은 거죠.” 충분히 연차가 쌓였고, 언제나 사랑스러운 가족의 존재 역시 든든하지만 끝내 혼자 짊어질 부분이 있다. 더욱이 천만 관객을 달성한 <범죄도시 4> 이후 다음 변신에 대한 고민까지 깊어지는 중이다. 김무열이 스스로에게 되뇌듯 이야기했다. “그냥 단순하게 일희일비만 하면 돼요. 그런 다음 빠져나오면 됩니다. 단단함과 유연함을 넘나들며 탄력적으로 연기하는 거죠.” 고민이 깊어지면 두려움도 커진다. 그럴 땐 다시 사소한 것, 아주 작은 것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 <스위트홈> 시즌 1이 공개되자마자 설렘으로 밤을 새우며 정주행하고, 좋아하는 만화책을 푹 빠져 읽을 때로 회귀하는 것이다. “연재 중인 만화 <히스토리아>라고 아세요? 디스토피아물보다는 역사물에 가까운데 아주 재미있어요. 좀비물도 좋아해서 <28일 후>(2003), <28주 후>(2007) 시리즈랑 <나는 전설이다>(2007), 비고 모텐슨이 나온<더 로드>(2010), <미스트>(2008)도 재미있게 봤어요.” 연습, 연구, 자기 관리, 그런 것으로 가득한 20대를 지나온 김무열은 30대에 깨달은 유연함으로 확실히 더 좋은 배우가 됐다. “막상 현장에 가서 다른 배우들과 함께 연기를 하면 변수가 많아요. 열심히 기획한 것을 무기로 삼되 언제든 바꾸고 뒤집을 수 있는 대범함과 자유로움이 있어야 작품에 잘 어우러질 수 있거든요. 아, 그러고 보니 <스위트홈>에서 그런 순간이 많았어요.” 모든 것을 낱낱이 기억할 필요는 없다. 좋은 기억만 남기고, 그렇지 않은 것은 흩어지게 놔둔다. “내년에 이야기를 나눈다면 또 아무 고민이 없다고 할지도 몰라요. 결국 좋은 기억만 남을 테니까요.”
설렘으로 쥔 하얀 도화지, 오정세
잔뜩 억눌리고 경직된 세상을 활보하는 유일한 존재. 순수한 과학적 호기심과 광기 사이에서 괴물화를 연구하는 임 박사가 예상치 못한 웃음기를 유발하며 응집된 긴장감을 순식간에 흐트러뜨린다. 주연과 조연, 단역과 특별 출연을 모두 오가며 연기혼을 불태워온 오정세에게도 그런 임 박사는 흥미로운 역할이 아니었을까. 오정세의 상상력이 여지없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임 박사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선인일까 악인일까?’ 이런 질문에서 시작해 ‘애완동물처럼, 임 박사가 괴물과 친구가 될 수 있는 존재라면 어떨까?’라는 상상도 해봤습니다.” 그러다 찾아온 깨달음. “다른 사람들은 변화된 세상에 적응 못하고 억눌려 있는데 그 와중에도 임 박사는 나름대로의 돌파구를 찾으며 애를 쓰잖아요. 나만 살자도, 정의롭게 모두를 살리자도 아니에요. 지극히 현실적이고 유연하게 반응하는 사람이죠.” 앞서 드라마 <지리산>(2021)에서 만난 이응복 감독은 시즌 2 합류에 대한 고민을 상쇄해준 인물이다. 맨 처음 캐스팅 제의를 받았을 때 오정세는 그와 편안하게 교류한 현장을 상기했고, 곧이어 “이 특별한 세계관에 들어가 놀고 싶었다”. 시즌 2 마지막에 스타디움 바깥으로 나가는 임 박사에게 선글라스와 보터 햇을 씌우고 캐리어를 끌게 한 것 역시 오정세의 아이디어였다. (해당 장면을 촬영하기 2주 전에 들은 지인의 꿈 이야기에서 착안했다.) “1년 넘게 지하에 갇혀 지내다가 처음 바깥으로 나가잖아요. 완수할 미션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소풍 가듯 설레지 않을까 싶었어요.” 오정세의 다른 인터뷰를 읽다 보면 사실 이런 대목은 차고 넘친다. 더 사실적이고 디테일한 연출을 위해 그의 머릿속은 쉴 새 없이 회전한다. 물론 시행착오도 있었다. “예전에는 10개의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자기 검열부터 했어요. 내 욕심인 것, 상대 배우에게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작품에 꼭 필요하지는 않은 것, 그런 선택지를 접어가다 보면 결국 하나 남을까 말까였죠. 그런데 언젠가부터 그렇게 버려지는 8~9개의 아이디어가 아까웠어요. 그때부터 감독님과 상대 배우에게 얘기했죠. 그중 하나도 반영되지 않더라도 저는 정말 괜찮아요. 그런 게 연기의 즐거움이니까요.” 아무도 몰라봐도 상관없다. 순수한 즐거움을 누리며 열린 마음으로 유쾌하게 연기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스위트홈> 시즌 3가 모두 공개되었을 때 그가 기대하는 것 역시 결국 작품 칭찬이다. “작품에 한 획을 그은 캐릭터로 칭찬받아도 물론 기분이 좋지만 그 마음은 한 5% 정도일까요. 95%는 작품에 쏠려 있어요.” 오정세라는 이름을 품은 100편도 넘는 필모그래피가 증명하듯 그는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왔다. 그런 오정세가 최근 친구가 사는 하와이에 다녀왔다며 해맑게 웃었다. “해외를 많이 안 나가봤거든요. 마침 일도 없어서 한 달 동안 정말 푹 쉬고 왔습니다. 책은 갖고 갔으나 한 장도 읽지 않았고, 서핑은··· 바닷가에 앉아 다른 사람이 하는 것만 열심히 지켜봤지만요.” 놀랍게도 오정세의 일하는 마음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즐겁게, 감사하게, 소풍 가듯이, 끝나고도 기분 좋게, 하여튼 늘 즐겁게 촬영에 임하고 싶어요. 제가 선택한 일이니까요.”
풍선처럼 부푼 마음, 김시아
눈부신 햇살로 가득한 온실, 빼곡하게 심긴 꽃 사이로 곤히 잠든 ‘아이’의 모습이 <스위트홈> 시즌 2에서 처음으로 드러난 순간, 앞으로의 이야기는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 자명해졌다. 넷플릭스 시리즈 <킹덤: 아신전>(2021)에서 전지현의 아역으로, <고요의 바다>(2021)에서 ‘루나 073’이라는 미스터리한 소녀로 처음 등장할 때처럼 김시아는 신비하고 강렬한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는 인간과 괴물의 경계에 선, 신인류의 신분으로. 이진욱의 몸을 차지한 남상원과 서이경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심상치 않은 능력을 타고난 ‘아이’는 남은 세상을 구원할지, 파멸로 이끌지에 대한 키를 쥔 중요한 인물이다. 올해 열여섯 살인 김시아는 ‘아이’를 어떻게 이해하고 연기했을까. “‘아이’는 괴물도 인간도 아니지만 스스로 괴물에 조금 더 가깝다고 여기는 인물이에요. 인간에 반감을 갖기도 하지만, 저는 ‘아이’가 괴물과 인간 사이 큐피드라는 생각으로 연기했어요. 처음엔 어려웠지만 신선한 캐릭터라 느낀 후엔 재미있게 연기했죠.” 시즌 2 마지막에 차현수의 손에 이끌려 혼수상태에 빠진 엄마를 보러 간 ‘아이’가 엄마를 괴물로 만든 까닭을 묻자 꽤 명쾌하게 답한다. “엄마는 ‘아이’를 내내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데요. ‘아이’는 자신이 괴물이기 때문에 엄마가 그런다고 여기죠. 그래서 엄마도 괴물이 된다면 자신을 싫어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으로 괴물로 만든 것 같아요.” 김시아는 지난해 한림연예예술고등학교 영상제작과에 조기 입학해 연기 지식을 넓히고 있다. 이번엔 현장에서 많은 질문을 던진 후 자기만의 답을 정리하는 식으로 역할에 스며들었다. ‘아이’를 큐피드라고 소개한 이응복 감독의 말에 영감을 받아 스스로 알록달록한 니트웨어와 핑크색 벙어리장갑 등으로 스타일링한 것처럼. 먼저 연기를 시작한 동생(김보민)은 김시아의 든든한 연기 동료다. “동생과 연기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것에 대한 마음이 더 커져요. 하고 싶은 게 너무나 많은데요. 다양한 직업과 성격을 가진 캐릭터를 통해 여러 경험을 할 수 있기에 즐겁게 연기하고 있어요.” 일찍이 배우의 길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해준 데뷔작 <미쓰백>(2018), 첫 해외 영화제(제73회 베를린국제영화제)를 경험했던 <길복순>(2023), CG와 판타지 요소로 연기에 상상력을 더해준 <스위트홈>까지, 모든 작품이 김시아의 세계에 하나같이 파동을 일으켰다. “다들 그렇듯이 저만의 방식대로 목표를 이루기 위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어요.” <스위트홈> 이후 김시아는 벌써 다음 목표로 마음이 바쁘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또 학교에 다니면서 새로운 도전을 많이 했는데 이 배움을 토대로 멋진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아이는 쑥쑥 성장한다. 반짝이는 눈과 낯선 세상에 바짝 귀 기울이고, 전해 듣는 모든 이야기에 온 마음을 내주며. (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