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S/S 파리 패션 위크 DAY 6
흐름을 따르는 대신 흐름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파리 패션 위크 6일 차를 장식한 디자이너들이 그랬죠. 발렌티노에서 새로운 시작을 알린 알레산드로 미켈레와 이자벨 마랑, 듀란 랜팅크 모두 옷과 아름다움에 대한 저마다의 뜻을 눈치 보지 않고 펼쳐냈습니다. 그 대쪽 같은 개성에 설득당하지 않기가 더 힘들더군요. 한층 진해진 색과 메시지로 옷이 주는 즐거움을 상기시킨 파리 패션 위크 6일 차, 오늘의 쇼를 만나보세요.
발렌티노(@maisonvalentino)
알레산드로 미켈레가 발렌티노의 런웨이로 돌아왔습니다. 컬렉션은 지난 2년간의 공백을 메우려는 듯, 호화롭게 아름다웠습니다. 유도 경기장, 도조 드 파리는 깨진 거울 바닥과 하얀 덮개로 덮인 오브제로 꾸며졌습니다. 그 풍경은 보물이 숨겨진 오래된 대저택의 지하실을 보는 것처럼 신비로웠죠. 이후 등장한 85가지 룩은 발렌티노가 쌓아온 방대한 아카이브를 미켈레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결과였습니다(미켈레가 가장 잘하는 것 중 하나죠). 모든 시대의 아름다움이 한 벌 한 벌에 깃들어 있었습니다. 발렌티노만이 낼 수 있는 가볍고, 페미닌하고, 정교한 디테일과 함께요. 리본, 태슬, 러플과 깃털, 도트 패턴과 자수, 화려한 색조가 폭포처럼 쏟아졌습니다. 실크 터번과 레이스 장갑, 스타킹과 롱부츠, 그리고 고양이 클러치까지! 액세서리가 빈틈을 남김 없이 채워냈고요. 쇼장에 울려 퍼진 ‘파사칼리아 델라 비타(Passacaglia Della Vita)’의 ‘We must rejoice, joy we must find’라는 가사가 미켈레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습니다. 조용한 럭셔리와 미니멀 패션에 익숙해졌던 우리가 잊고 있던 옷의 또 다른 기쁨을 일깨워주었거든요. 그렇게 발렌티노의 새로운 시대가 이제 막 시작됐습니다. 미켈레의 낭만을 망토처럼 두르고서요!
이자벨 마랑(@isabelmarant)
“우리 뿌리로 돌아가서 정말 수공예적인 걸 해보고 싶었어요.”
이자벨 마랑은 장인 정신에 집중했습니다. 아마존에서 영감을 받아서일까요? 그 모습은 더욱 야심 차고 호기로워 보였죠. 쇼가 펼쳐진 곳이 파리가 아닌 야생으로 느껴질 정도로요. 컬렉션에서는 이자벨 마랑과 디자인 디렉터 킴 베커의 정교한 손맛이 구석구석 느껴졌습니다. 시종일관 펄럭이는 프린지 가닥, 지그재그로 촘촘히 땋은 솔기와 나비를 연상시키는 실크 원사 패턴 등 생동감 넘치는 디테일이 모든 룩을 넘나들었죠. 색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노란빛부터 분홍색과 보라색 등 따스하고 영롱한 빛깔은 시시각각 변하는 일몰의 색을 그대로 추출한 듯했죠. 하지만 무엇보다 돋보인 건 모든 모델이 평평한 플랫 슈즈를 신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마랑은 “소녀들이 플랫 슈즈를 신었으면 해요. 자유를 느낄 수 있도록요. 더 이상 힐을 신는 사람은 없으니까요”라고 말했습니다. 이번 쇼가 유난히 친절하게 느껴진 이유입니다.
듀란 랜팅크(@duranlantinkyo)
많은 이들이 고대한 쇼였습니다. 단순히 LVMH 프라이즈 ‘칼 라거펠트 특별상’의 주인공이어서는 아니었을 겁니다. 듀란 랭티크는 모두가 안전을 부르짖는 현 패션계에서 독창성과 재미를 추구하는 몇 안 되는 디자이너 중 한 명이니까요.
그는 이번 시즌 해변으로 향했습니다. 원피스 수영복과 합쳐진 동그란 튜브 디테일은 지난 S/S 시즌보다 더 절묘하고 감쪽같았죠. 비키니 톱을 비롯한 상의의 가슴 부위는 패드를 잔뜩 넣은 것처럼 부풀었습니다. 관절 부위에 패딩을 덧댄 울퉁불퉁한 보디 수트는 곤충, 아니 외계인처럼 보이게 했고요. 핸드백은 아주 태연하게 모자가 되었습니다. 헐렁한 트렌치 코트와 코르셋 디테일을 활용한 드레스에서는 ‘웨어러블’에 대해 고민한 그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극단적이고 과장된 실루엣이 그의 부정할 수 없는 필체가 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