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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 한강의 문장들

202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 Getty Images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폭로하는 강렬한 시적 산문’

한강이 202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프랑스 <보그>는 이를 두고 ‘한강의 승리’라 표현했을 정도로 그녀의 수상이 해외에서도 주목받고 있죠. 아시아 여성 문학가로서는 최초의 수상이라는 점과 역사 속 개인의 삶을 포착해내는 특유의 세계관에 주목해서입니다. 그러나 스웨덴 한림원은 ‘문장의 힘’을 여러 차례 이야기했습니다. 안데르스 올손(Anders Olsson) 노벨 문학상 위원회 위원장은 “한강은 육체와 영혼, 산 자와 죽은 자 사이 연결 고리에 관한 독특한 인식을 시적이고 실험적인 현대 산문으로 표현한 혁신가로 평가됩니다”라며 수여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그러면서 “한강은 자신의 작품에서 역사적 트라우마와 보이지 않는 지배에 맞서는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냈다”라며 “그 은유를 통해 강렬한 시적 산문을 보여줬다”라고 말했죠. 스웨덴 아카데미 회원인 안나 카림 팔름(Anna Karim-Palm) 또한 “그의 산문은 매우 강렬하면서도 서정적이고 부드러우면서도 잔인하다”고 평하며 문체에 주목했습니다.

시적 산문이라는 한림원의 평처럼 본래 한강은 1993년 시인으로 먼저 데뷔했으며, 이듬해 소설가로 등단했습니다. 특유의 시적이면서도 서정적인 문체는 비극적 세계관과 만나 비애감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죠. 영국 <가디언>은 이를 두고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운 산문과 믿을 수 없을 만큼 폭력적인 내용의 조합이 충격적”이라고 한 바 있습니다. 그 말처럼 섬세한 감수성으로 매만진 문장들은 칼처럼 마음을 서걱거리며 관통하고, 때로는 불편하게, 때로는 미어지도록 만듭니다. 한강은 연약하지만 흐르기를 멈추지도 주저하지도 않았습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중 하나인 그녀의 이름은 이제 강보다 더 넓은 세상을 품었습니다. 아름답고도 슬픈 한강의 문장들을 만나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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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소년이 온다>(창비, 2014)

<소년이 온다>(창비, 2014)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99쪽)

그렇다면 우리에게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이 무엇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95)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 (79)

<채식주의자>(창비, 2007)

이 모든 것을 고요히 받아들이고 있는 그녀가 어떤 성스러운 것, 사람이라고도, 그렇다고 짐승이라고도 할 수 없는, 식물이며 동물이며 인간, 혹은 그 중간쯤의 낯선 존재처럼 느껴졌다. (128쪽)

언니.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아.
(210쪽)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 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량한 인간임을 믿었으며, 그 믿음대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성실했고, 나름대로 성공했으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락한 가건물과 웃자란 풀들 앞에서 그녀는 단 한번도 살아본 적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237)

<흰>(난다, 2016)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81)

얼굴로, 몸으로 세차게 휘몰아치는 눈송이들을 거슬러 그녀는 계속 걸었다. 알 수 없었다. 대체 무엇일까, 이 차갑고 적대적인 것은? 동시에 연약한 것, 사라지는 것,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이것은? (64)

만일 당신이 아직 살아 있다면, 지금 나는 이 삶을 살고 있지 않아야 한다. 지금 내가 살아 있다면 당신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어둠과 빛 사이에서만, 그 파르스름한 틈에서만 우리는 가까스로 얼굴을 마주 본다. (117쪽)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 2021)

생명이 얼마나 약한 것인지 그때 실감했다. 저 살과 장기와 뼈와 목숨 들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고 끊어져버릴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 단 한 번의 선택으로. (15쪽)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 (311쪽)

<바람이 분다, 가라>(문학과지성사, 2010)

기도를 들어주는 누군가가 정말 존재했다면 난 이미 여러 번 죽었을 겁니다.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건, 그때마다 내가 그만큼 더 강하게 살아 있길 택했다는 걸 뜻합니다. 이건 말장난이 아닙니다. (146쪽)

무한히 번진 먹 같은 어둠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고 삼촌은 말했지. 생명이란 가냘픈 틈으로 이 모든 걸 지켜보고 있지만, 언젠가 우리한테서 생명이 꺼지면 틈이 닫히고, 흔적 없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게 될 거라고. (385쪽)

<검은 사슴>(문학동네, 2017)

세상에는 서서히 미쳐가는 사람들도 있는 거 아닐까요? 서서히 병들어가다가 폭발하는 사람 말예요. 줄기가 뻗어나가다가, 한없이 뻗어나갈 듯하다가, 그 끝에서 거짓말처럼 꽃이 터져나오듯이…… (346쪽)

나는 외로움이 좋았다. 외로움은 내 집이었고 옷이었고 밥이었다. 어떤 종류의 영혼은 외로움이 완성시켜준 것이어서, 그것이 빠져나가면 한꺼번에 허물어지고 만다. 나는 몇 명의 남자와 연애를 해보려 한 적이 있지만, 내가 허물어지는 것을 견딜 수 없어 그때마다 뒤로 물러서곤 했다. 나는 그들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다만 외로웠던 것뿐이었다. 그러니 새삼 그들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느니 마느니 하는 자책을 느낄 필요도 없었다. 나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나 자신뿐이었다. 그것을 똑똑히 알고 있는 바에야, 내 배반을 진작부터 명징하게 점치고 있는 바에야, 누구도 희생시키지 않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나는 징그럽게 차가운 인간이었다. (4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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