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은 새로운 시작일 뿐” 니콜라 제스키에르의 루이 비통 10년史

니콜라 제스키에르의 루이 비통은 지난 10년 동안 역사적 서사와 미래적 비전이 혼합된 커다란 세계를 보여주었다. 패션과 제스키에르는 서로에게 여전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그는 일에서 멀리 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ALL IN 파리 외곽에 있는 시골집에서 두 마리의 검정 래브라도 반려견 레옹(Léon), 아실(Achille)과 함께 있는 제스키에르.

지난 3월, 루브르박물관의 주요 안뜰 중 하나인 쿠르 카레(Cour Carrée)에서 선보인 루이 비통 2024 가을/겨울 쇼에는 앞날에 대한 니콜라 제스키에르(Nicolas Ghesquière)의 비전뿐 아니라 지난 세월에 대한 견해도 담겨 있었다. 이번 컬렉션은 그가 루이 비통에서 아티스틱 디렉터로 일한 10년을 기념한다. 최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교체 주기가 갈수록 짧아지고 있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 10년은 어떤 기준으로도 인상적인 재임 기간이자 그의 뛰어난 능력을 입증하는 것이다. 동시에 제스키에르의 비전이 그동안 일관성 있게 전개되어왔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오늘날 패션계의 대부분이 그렇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런웨이는 이전 작업을 둘러보는 일종의 투어와도 같았다. 시프트 드레스와 터틀넥, 잇 백과 프록 코트 등 과거에 등장한 수많은 의상과 액세서리는 일관된 방향성을 드러내며 2024년을 위한 하나의 컬렉션을 완성했다. “시즌을 거듭할수록 그의 아이디어가 성숙해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스키에르 쇼의 단골손님인 미국 영화감독 에바 두버네이(Ava DuVernay)가 설명했다. “그의 아이디어는 여행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삶을 살아가고 있어요.”

몇 달 후 제스키에르는 스튜디오로 한 무리의 모델을 소집했다. 당시 삶의 리듬 안으로 돌아가 지난 10년간의 모든 것을 다시 돌아보기 위한 준비에 돌입했다. “안녕, 사샤!” 모델 사샤 쿠엔비(Sacha Quenby)가 들어서자 제스키에르가 큰 소리로 외쳤다. 사샤는 리본처럼 몸에 두르는 보라색 상의에 높은 부츠, 잔뜩 부풀린 조퍼스 팬츠를 입고 방 한가운데서 워킹을 시작했다. 스튜디오는 넓고 밝았으며, 크림색 카펫이 놓인 금속 선반 위에는 루이 비통 가방이 놓여 있었다. 제스키에르는 팀원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캐스팅 디렉터 애슐리 브로카우(Ashley Brokaw), 하우스의 디자인 및 이미지 디렉터 플로랑 부오노마노(Florent Buonomano), 스타일리스트 겸 에디터로 제스키에르와 30년을 함께 일한 마리 아멜리 소베(Marie-Amélie Sauvé)다. “중국은 즐거웠어?” 제스키에르는 지난달 자신의 상하이 쇼에 함께한 사샤에게 물었다. “재미있었어요.” 그녀가 다시 한번 워킹을 하며 대답했다. “예쁘지 않나요?” 제스키에르가 팀원들을 향해 의견을 묻자 소베가 “아름다워요”라고 말했다. “꽃 프린트가 멋지게 어울릴 거예요.” 그가 흡족해했다.

제스키에르는 활기차고 세련된 면모를 갖고 있어서, 그가 디자인하는 강한 여성 페르소나의 영원한 조력자 역할에 잘 어울린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옅은 푸른색 눈동자를 지녔으며, 젊은 시절 길었던 진갈색 머리칼은 이제 짧고 깔끔하게 다듬어져 있다. 53세의 그는 잿빛이 도는 구레나룻을 기르고 몸에 딱 맞는 실용적인 옷을 입는다. 차분한 색상의 나이키 ACG 운동화(오늘은 회색이다), 아름답게 만들어진 넉넉한 스웨트셔츠(대부분 검정이다)와 캐주얼한 바지처럼 말이다. 그는 브로카우, 부오노마노, 소베와 함께 크롬 프레임 테이블에 앉아 있고 근처 기둥에는 모델 헤드샷으로 가득한 거대한 폼보드가 세워져 있다. 방을 가로질러 워킹하는 모델은 루이 비통 신발을 신었지만, 옷 대신 원단만 걸친 모습이다. 새 컬렉션이 대부분 아직 작업 중이기 때문에 완성된 의상의 움직임과 실루엣을 체크하기 위해 재단만 간단히 한 원단을 입은 것. 이 정도로 광범위한 사전 준비 작업은 이례적이긴 하지만 세계에서 손꼽히는 최대 브랜드이기에 필요한 과정이다. 제스키에르의 10주년 기념 쇼에는 4,000명의 게스트를 초대했지만, 온라인으로 관람한 사람은 약 5억 명에 달한다.

“한때 패션은 괴짜들을 위한 것이었죠.” 어느 순간 제스키에르가 이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가 비즈니스를 시작했을 무렵인 1990년대에 유행을 선도하는 사람은 소규모 아웃사이더와 열정적인 인습 타파자였다. 패션계 밖 세상에서 이들은 외계인 취급을 당하거나 놀림받기 일쑤였다. 이제 패션은 창조 산업과 전 세계 셀러브리티라는 거대한 기계를 돌리고 있다. 수십억 개의 인스타그램 채널이 패션을 열정적으로 수용하고, 평가하고, 해석하면서 연예계 못지않은 주류가 된 패션의 수익성 또한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이 모든 상승 기류와 함께 거둔 성공 중에서 루이 비통만큼 빠르고 높이 성장한 브랜드도 없을 것이다.

“10년 전과 비교할 순 없지만, 이 일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제스키에르가 말했다. 지난해 제스키에르는 봄/여름, 가을/겨울, 크루즈 등 세 번의 여성 컬렉션 모두 직접 디자인했으며, 하우스는 ‘보야제(Voyager)’라고 부르는 네 번째 컬렉션을 추가했다. 현재 가장 큰 성장 기류를 보이는 아시아 시장을 겨냥한 컬렉션이다. “처음 한국에서 쇼를 하자고 제안했을 때 다들 조금 충격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가장 먼저 좋다고 말한 사람이 바로 니콜라였죠.” 지난 1년 반 동안 루이 비통 CEO로 재임한 피에트로 베카리(Pietro Beccari)가 설명했다. 그는 매장으로 빠르게 제품을 공급하며 해당 아이디어를 밀어붙였다. “말하자면 우리 버전의 ‘See Now, Buy Now’인 셈이죠.” ‘See Now, Buy Now’는 패션쇼 관객이 에디터와 바이어라는 제한된 집단에서 세계로 확장된 이래 패션계의 핵심 문구가 되었다. 이는 제스키에르가 3월에 하나, 4월에 하나, 5월에 또 다른 하나의 주요 컬렉션을 발표하기 위해 놀라운 속도로 맹렬히 일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가속도에 잘 대처하는 것이 중요해졌습니다.” 요즘 제스키에르는 스스로 느끼기에 지독하게 이른 시간(오전 7시)에 일어나 회의와 피팅, 각종 일정으로 가득한 하루를 준비하는 데 몰두한다. “스튜디오 규모가 커지고, 아틀리에도 성장했어요. 우리도 적응해야 했습니다.” 그는 눈이 마주칠 때마다 커다란 잔에 담긴 프랑스 커피를 연이어 들이켜고 있었다. 거의 다 타버린 담배꽁초의 불로 새 담배에 불을 붙이는 애연가처럼 말이다.

“치마는 세 벌이면 충분한 것 같아요. 같은 형태를 반복하는 건 마음에 들지 않아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제스키에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보드를 살펴보고 신중하게 말을 꺼냈다. “아니, 다른 것도 있어요.” 부오노마노가 급하게 일어서며 답했다. “다른 형태요?” 제스키에르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아! 맞군요, 이 룩에 매치한 치마가 있었지!” 그때 다시 새로운 모델이 큐롯 팬츠에 하이힐을 신고 숄을 두른 채 스튜디오로 들어왔다. 베네수엘라 출신의 아메리카 곤잘레스(América González)다. 네 번째 치마를 발견해 기분이 좋아진 제스키에르가 그녀를 따뜻하게 맞았다. “안녕, 아메리카!” 그는 함박웃음과 함께 소리쳤다. 아메리카도 활짝 웃으며 인사했다.

10년 전 내가 <보그>에서 제스키에르에 대해 처음 다룬 건 그가 발렌시아가에서 급부상한 후 일약 스타처럼 루이 비통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된 직후였다. 이는 60년 이상 활동한 디자이너들까지 넘어선 엄청난 성공이었다. 파리에서 다시 만난 제스키에르는 친절했지만 어딘가 날이 선 느낌이었다. 조심스럽고 내성적이면서도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는 것 같았다. 2014년 초부터 서서히 시작된 그의 프로젝트는 단순히 하나의 컬렉션이 아니라 무드와 스타일, 하우스에서 앞으로 펼쳐질 그의 미래를 가이드할 키워드의 단어장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새로운 프로필’에 대한 그의 설명은 그리스 신화 속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녀 헬레네를 바짝 뒤쫓는 것처럼 들렸던 게 사실이다.

런웨이 쇼를 본 후에야 나는 그가 말하려던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의 초기 컬렉션 의상을 더 정교하게 발전시킨 새로운 실루엣은 과거 10년의 패션을 축약하면서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는 역할을 했다. 어깨를 강조하는 의상은 정밀했으며, 몸통은 길면서도 몸에 꼭 맞았다. 제스키에르의 시그니처인 세련된 첨단 직물은 루이 비통의 V 모티브를 적용해 미래적이고 기하학적인 형태로 잘려 있었다. 무릎 바로 위로 떨어지는 헴라인에서는 젊은 활기가 느껴졌고, 의상에 매치한 앵클 부츠는 다리를 더 길고 곧아 보이게 했다. 제스키에르의 하이브리드적 천재성이 투영된 새로운 실루엣은 누구에게나 거의 모든 방식으로 여러 요소를 결합하고 있었다. 파리지엔다우면서도 세계 어디서나 통용되고, 출근복에 적합할 만큼 격식 있으면서 애프터 파티에 어울릴 정도로 충분히 로맨틱하게. 물론 상징적인 정체성은 그대로 유지한 채 말이다.

“그는 예리하면서도 강한 여성성을 추구해왔습니다.” 그의 오랜 후배이자 친구인 라반의 아티스틱 디렉터 줄리앙 도세나(Julien Dossena)가 말했다. “온전히 그의 취향이었지만 루이 비통과도 잘 맞았죠.” 그리고 머지않아 눈이 닿는 모든 곳에서 그의 스타일과 브랜드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제스키에르가 루이 비통에 합류했을 때만 해도 하우스는 리테일로 연간 90억 달러의 수익을 내고 있었다. 지난해에는 200억 달러를 넘어섰으며, 이는 모그룹인 LVMH 총수익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그의 영향력이 확장됐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니콜라는 레디 투 웨어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루이 비통에 코드를 정립했습니다.” 베카리는 이렇게 말했다. 10년 전 새롭게 여겨지던 실루엣은 이제 럭셔리 시장에서 가장 큰 제국의 문장이 되었다.

제스키에르는 지난해 가을 계약을 갱신했다. 그가 추후 루이 비통에 최소 5년 이상을 머문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는 헌신이라는 개념을 말할지도 모른다. 피비 파일로나 에디 슬리먼 등 같은 세대 디자이너의 다소 참을성 없는 커리어에 비하면 말이다. 제스키에르는 쇼가 열린 다음 날 아침 신문 가판대에서 컬렉션 리뷰를 확인하던 시기에 명성을 얻었다. 소셜 미디어 지각변동이 그를 미처 몰아내지 못한 시기 말이다. 그는 브리지트 마크롱(Brigitte Macron)이 2016년 남편의 대통령 선거 캠페인을 하고 있을 때도, 그리고 세계적인 격변 이후 2020년대에 영부인이 된 그녀가 프랑스의 장인 정신과 기술력의 상징으로 루이 비통 옷을 입을 때도 루이 비통의 중심에 있었다(제스키에르는 ‘브리지트’라고 이름을 부를 정도로 가까운 영부인과의 친분에 대해 사회적 지위나 이해타산에 의한 관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녀가 쇼를 보러 왔고 쇼가 끝난 다음 잠깐 점심을 함께 먹었는데 그때 친해졌어요.”). 루이 비통에서 10년을 보낸 지금, 누군가는 제스키에르의 커리어가 동년배 디자이너보다 위 세대 거물급 디자이너들과 더 잘 맞는다고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한때 어시스턴트로 일했던 장 폴 고티에와 이브 생 로랑, 아제딘 알라이아, 샤넬의 재치 있는 마법사 칼 라거펠트 같은 이들 말이다. 2019년 이후 프랑스 패션계에는 칼 라거펠트의 부재라는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독특하면서도 정제된 미적 감도, 상업적 야망, 앰배서더로서의 존재감, 영속성을 겸비한 그를 대체할 확실한 후보가 없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파리에서 가장 오랫동안, 가장 높은 위치에서 활동 중인 디자이너로서 제스키에르는 그 자리에 두 번째로 가장 적합한 인물일지 모른다.

“그는 패션에만 한정되지 않은, 세상에 대한 전반적인 관점이 있어요.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자신만의 매우 구체적인 방식이죠. 그렇기 때문에 그를 패션 디자이너일 뿐 아니라 진정한 아티스트라고 여깁니다.” 소베의 말에 이어 펜디에서 라거펠트와 일한 적 있는 베카리가 이렇게 덧붙였다. “니콜라는 과거에 한번 했던 디자인은 절대 반복하고 싶어 하지 않아요. 그런 점에서 칼과 매우 비슷합니다. 옷의 구조와 디테일에 집착하는 것도 말이죠.”

정작 제스키에르 자신은 비교를 경계하며 라거펠트의 독창성을 지켜주려 한다. “난 그 정도로 독보적인 인물은 아닌 것 같아요.” 정교하고 절제된 스타일로 꾸민 사무실 소파에서 그가 말했다. 그는 검정 바지와 고티에풍 줄무늬 셔츠를 입고 있었다. “칼은 세상에 자신의 독특한 캐릭터를 보여줬고 사람들은 거기에 반응했죠. 나는 어떤 면에서 카멜레온 같습니다. 내가 하는 창의적인 작업 과정의 일부와 이어지기도 하고요.”

만약 그가 영향력 있는 리더로서 책임감을 인식하고 있다면, 현재 엄청난 규모와 영역을 장악하고 있는 패션 산업이 인습 타파적으로 ‘특이한 사람들’의 시대를 형성했던 시절의 가치에 대한 관점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할 일이 더 있다. 우리는 프랑스가 정치적 혼돈을 겪는 여름 내내 대화를 나눴다. 반이민주의자이자 성 소수자에 반대하는 극우파들이 7월 선거에서 패하기 전에 권력과 지지를 모으려 애쓰고 있는 듯했다. “이렇게 거대한 플랫폼을 소유한 루이 비통 같은 브랜드에서 일하려면 매우 조심해야 해요. 권력이 주어진 위치에 오른다면 배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그는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패션계에서 진보적인 아웃사이더 무리의 가치를 재주장할 때가 무르익었다고 여긴다. “옷 입기는 한때 금지된 방식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그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실루엣과 새로운 관점, 새로운 캐릭터, 새로운 인물, 헤어나 메이크업을 하는 새로운 방식, 성 구분을 허물고 다른 체형을 제시하며 여권신장을 지지하는 것이 원칙이죠.” 좋은 컬렉션은 수용의 한계를 줄이는 게 아니라 넓히는 데 기여한다. 주류에서 그 영향력을 발휘할 때 그 효과도 더 커진다. “사람들이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을 받아들이도록 만들 수 있는 좋은 방안입니다.”

제스키에르는 성전환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우던 시기에 선보인 2020년 봄/여름 컬렉션을 예로 들었다. 여자 모델과 젠더리스 모델이 워킹하는 런웨이로, 지금은 사망한 스코틀랜드 출신 트랜스젠더 뮤지션 소피(Sophie)가 ‘It’s Okay to Cry’를 부르는 클로즈업 영상이 거대한 스크린에 펼쳐졌다. 또 다른 예로 내부 여론의 반대에 맞서 일본 애니메이션 ‘세일러 문’에서 영감을 얻은 컬렉션을 기획하고 세일러 문 마니아인 모델 페르난다 리(Fernanda Ly)를 광고 모델로 세운 적도 있다. “그게 내가 이 자리를 원한 이유입니다. 다른 표현을 조명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알고 있었으니까요.” 세일러 문 컬렉션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물론 우리가 만드는 것은 사치품입니다. 모두가 우리 옷을 입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누구나 우리 옷을 입은 자기 모습을 상상할 자유는 있으니까요.” 그는 이런 절충적인 접근 방식을 소셜 미디어의 장점 중 하나로 본다. 루이 비통의 고객에 속하지 않더라도 하우스가 가치를 부여하는 이단아적인 자기표현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제스키에르는 루이 비통의 많은 부분이 크고 활기차 보이기 때문에 이런 미묘한 영향력의 포인트를 잘 알고 있다. 그는 자신의 런웨이에서 처음 워킹을 하는 신인 모델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의 팀은 마음에 드는 누군가를 발견하면 6개월 독점 계약을 제안해 그들의 집중적인 비전 아래 훈련받게 한다. “모델을 보호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과거에 봤듯이 너무 빠르게 많이 노출되면 정신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경우가 생기곤 하거든요.” 막 일을 시작한 10대 시절 고티에와 일한 경험을 돌이켜보면, 패션계의 해로운 권력 다툼에서 그를 보호해준 디자이너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거기서 많은 걸 배운 건 아니에요, 커피 끓이고 복사하는 게 다였으니까요. 하지만 30년도 더 지난 지금 깨달은 것은 그들이 나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내가 상징하는 것은 나를 그 길에 계속 있게 해준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발렌시아가에서 제스키에르의 성장은 그저 잘 알려지지 않은 일련의 패션 관련 업무에서 한 단계 도약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패션계에서 가장 일하기 어려운 곳에서 발전한 것이었다. 그는 원래 일본 시장을 위한 장례복을 담당했지만 어마어마한 속도로 패션계 최고의 천재로 떠올랐다. “새로운 총아로 주목받는 것은 큰 자극이 됩니다.” 그가 건조하게 말했다. “그 순간이 항상 기억나고, 어쩌면 그 순간이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고 여기죠.”

오늘날 제스키에르가 직면한 도전은 다르다. 그는 이제 이 분야의 원로로,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며 자신의 방대한 컬렉션을 앞으로 끌고 나가는 한편 새로운 총아들이 주목받는 모습을 지켜본다. “더 이상 가장 인기 있는 디자이너가 될 순 없겠죠. 하지만 그 시즌을 정의하는 디자이너가 될 순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죠?” 제스키에르는 일부 신예 디자이너는 그에게 아무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의 작업은 존경스러울 정도였고, 또 다른 이들의 작업은 너무 마음에 든 나머지 그들의 성공을 돕기도 했다(누구에게 도움을 줬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멘토로서 그는 디자이너들이 단순한 성공을 넘어 오래 지속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생각을 중요하게 여긴다. 도세나가 2013년 라반의 수장이 됐을 때 제스키에르는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니콜라는 이렇게 말했어요. ‘잘하고 있어, 하지만 중요한 건 그저 주목받는 것이 아니라 오래 지속하는 거야. 네 작업의 연속성을 확보하고 계속 이어나가는 것. 그래야 패션계에서 소모되지 않고 진정으로 만족할 수 있게 될 거야’라고 말이에요.”

어느 날 오후, 제스키에르를 따라 그의 사무실 아래 있는 아틀리에로 향했다. 파리 2구에 자리한 세련되고 고상한 빌딩은 올해 루이 비통이 임시로 사용하는 곳으로, 강변에 위치한 본사 건물 공사 때문에 전체 운영이 여기서 진행되고 있다. 오랜 시간 패션계에서 버텨온 한 사람으로서 제스키에르의 최근 삶은 놀랄 만큼 큰 변화를 겪고 있다. 그가 소유한 몇 채의 집도 개조 중이며, 그는 이 사실을 수줍게 언급했다. “나는 늘 뭔가를 시작할 필요성을 느끼곤 해요.”

루이 비통 아틀리에는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공간이다. 여러 개의 작업대가 재단과 드레이핑, 니트웨어 등 클래식한 패션 분야에 집중되어 있다. 제스키에르는 흥분에 찬 환호성을 내지르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내가 본 적 없는 걸 발견하게 될 것 같은데요!” 그는 루이 비통 여성복 테크니컬 디렉터로 아틀리에를 이끌고 있는 마리오 르프랑(Mario Lefranc)에게 외쳤다. 르프랑은 썰렁한 유머 감각을 가졌으며 냉철한 사람이다. 제스키에르는 비닐로 싸인 베이지색 드레스를 보고 잠시 멈춰 감탄했다. “이거 정말 마음에 들어요.”

파리에서는 드레이핑 작업을 ‘플루(Flou)’라고 부르는데, 프랑스어로 ‘헐렁한, 흐릿한’이라는 뜻이다. 모든 작업은 마네킹에 입힌 상태에서 시작해 입체적으로 완성된다. “우리가 전에 보드에서 보면서 하나 더 추가할지 고민하던 그 치마군요!” 그는 작업 중인 치마로 서둘러 다가가 플루 작업을 담당하는 마르고 로작 데페이(Margot Roszak Defays)와 의논하기 위해 멈춰 섰다. 오케스트라의 수석처럼 플루 ‘수석’인 그녀는 제스키에르와 22년 동안 함께 일해왔다. 발렌시아가를 떠날 때 제스키에르는 데페이와 함께 테일러링 수석 크리스텔 아르브푀유(Christelle Arbefeuille)를 데려왔다. “정말 마법 같은 손을 가졌어요. 플루와 드레이핑을 맡겼지만, 사실 그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답니다.”

“디자이너로서 항상 백지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백지 뒤에 키워드로 발전시켜온 지난 10년의 기본 요소가 있어요. 포켓, 디테일, 색상 조합, 특정한 바지 형태 등이 그것이죠. 그것들이 평온하게 만듭니다.” 그가 미소 지었다.

“제스키에르는 디자인의 경계를 허무는 사람이에요. 멧 갈라에서 짧은 드레스를 입고 그 드레스에 부츠를 신을 수 있고, 그다음엔 스니커즈와 반바지를 라이딩 재킷과 함께 입을 수 있다고 처음 말한 사람 중 하나였죠. 하지만 동시에 그의 디자인은 늘 아주 견고합니다.” 배우 제니퍼 코넬리(Jennifer Connelly)는 초창기부터 함께해온 그의 오랜 뮤즈다. “어떻게든 그런 것들을 모두 해내면서 전체 디자인의 균형과 착용감까지 유지합니다.”

제스키에르가 10주년 쇼 작업을 시작했을 때 그는 연필을 내려놓고 스튜디오에 사람들을 불러 모아 과거 컬렉션의 어떤 옷이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가치 있는지 질문했다. 그러고 나서 그것들을 섞고 조합하기 시작했다. 지난 시즌의 겨울 코트를 이브닝 드레스로 바꿀 수 있을까? “비평가들은 알아볼 수 있는 단서 게임이에요. 신입들은 눈치채지 못하겠지만, 스타일을 알아볼 수 있을 거예요.” 어떤 실루엣은 5~7년 전보다 더 많은 가능성을 지니고 재등장했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아름다운 럭셔리 하우스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는 주장했다. “지금까지 몇 년이 걸렸는지 그걸 보여주기 위한 기념 쇼가 필요했지만, 순환하는 것도 사실 괜찮다는 걸 깨달았어요.”

삶의 순환적인 본질, 거기에 수반되는 전진은 올해 제스키에르의 마음속에 중요한 주제였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그의 아버지가 지난 4월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그런 순간을 준비한다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어쩐지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처럼 느껴졌죠.” 친한 친구들과 어머니가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항상 내게 큰 영감을 주는 존재랍니다. 지금 이 순간에는 특히 더 존경스러워요. 강인하면서도 섬세하시죠. 미래에 대한 비전도 갖고 계시고요.”

아버지와 매우 가까웠던 제스키에르는 지난 1년 동안 가족과 함께한 시간을 떠올렸다. 지난해 센강에서 함께 저녁 보트를 타기도 했다. “긴 시간은 아니지만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는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런 시간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은 건 아니지만, 솔직히 일에 빠져서 너무 오랫동안 미뤄둔 것 같아요.” 그는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을 것이다.

2020년 1월 제스키에르는 그의 삶에서 무언가가 빠졌다고 간주한 친구 덕에 소개팅을 하게 됐다. 상대는 솔직하고 핸섬한 드류 쿠즈(Drew Kuhse)라는 남자였고, 그는 오클라호마에서 태어나 샌디에이고와 코스타리카 해변에서 성장했다. 쿠즈는 열여덟 살 때 더 큰 삶을 꿈꾸며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셀럽과 영화를 통해 제품을 노출하는 VIP 마케팅 분야에 발을 들였다. 리바이스로 시작해 레이밴과 페르솔에서 일했으며, 최근에는 캘리포니아의 마리화나 합법화 이후 대마초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있다. 그 와중에 연기 경력도 쌓았는데, 그중 가장 잘 알려진 역할은 과거 그의 룸메이트이자 절친인 더스틴 랜스 블랙(Dustin Lance Black)이 각본을 쓴 영화 <밀크>의 피자 배달원이다. 쿠즈가 첫 데이트에 늦은 그날은 급하게 정해진 제스키에르의 4일 캘리포니아 출장 중 하루였다. 일정이 바빴던 디자이너는 선셋 타워 호텔 레스토랑에 쿠즈가 도착했을 때 화들짝 놀란 걸 기억한다. “큰일 났다는 걸 느꼈습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말했다. “기분이 좋았어요. 설렜죠.” 그리고 그 순간을 ‘행복했다’고 표현했다.

제스키에르는 집으로 돌아왔고 뭔가가 변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제가 이 관계에 진심이라는 걸 깨달았어요. 파리로 돌아왔는데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거든요.” 그는 가을 컬렉션을 선보였고 쇼가 끝나자마자 다시 로스앤젤레스로 갔다. “거기서 해야 할 일이 있었어요. 하지만 드류를 보러 간 것도 있었죠.”

2020년 3월 중순이었다. 늘 그랬듯 루이 비통 쇼는 그해 패션 위크 스케줄의 마지막 일정이었지만, 제스키에르는 미 서부 해안으로 향하면서 그 쇼가 한동안 파리에서 열린 마지막 쇼가 될 거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2주 동안 로스앤젤레스에 머물렀고 집에서 전화로 업무를 처리했다. “마리 아멜리 소베와 줄리앙 도세나가 ‘봉쇄령이 내려질 거야’라고 하더군요.” 그가 회상했다. “어머니는 ‘돌아와!’라고 하셨고요. 모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대처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랑에 빠졌고요. 다들 ‘내일 비행기를 타면 돼’라고 했지만, 난 매일 돌아가는 비행기를 취소했죠.” 그는 쿠즈와 샤토마몽의 방갈로에 몸을 숨겼다. “드류는 진짜 쿨했어요. 뭐라고 설명할지 모르겠지만, 그의 친절함에는 진정성이 있어요.”

DOG DAYS 제스키에르와 그의 파트너 드류 쿠즈가 반려견 레옹과 아실, 새로운 가족으로 합류한 그레이하운드-테리어 믹스견 밴조(Banjo)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제스키에르는 마지못해 결국 비행기에 올랐고, 점점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사랑하는 이와 멀어진다는 사실에 상심한 채 돌아왔다. “언제 다시 드류를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으니까요.” 그리고 도세나, 소베와 함께 그의 시골집으로 도피했다. “다들 그랬듯 저도 집안을 돌보면서 새로운 삶의 방식에 적응하려 애썼죠.” 그는 당시 브랜드 디렉터이자 부사장이었던 델핀 아르노(Delphine Arnault)와 몇 주 동안 전화 통화를 하며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는 글로벌 판매 상황을 추적하려고 노력했다. 중국에 있는 루이 비통 매장은 거의 하룻밤 사이에 문을 닫았고, 그다음 몇 주 동안 비슷한 봉쇄령이 세계 곳곳에서 시행되고 해제되길 반복했다. “델핀은 컬렉션을 여러 번으로 나눠 출시하자고 했습니다.” 그가 회상했다. “쇼를 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기에 매달 소규모 테마 컬렉션을 진행하기로 했죠.”

이 미니 컬렉션을 홍보하는 것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그해 6월 제스키에르는 2개의 광고 캠페인에서 사진가 역할을 자청했다. 그중 하나가 테니스 스타 오사카 나오미(Naomi Osaka)와의 촬영이었는데, 촬영을 하려면 로스앤젤레스로 가야 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드류에게 돌아갈 수 있었죠.” 그가 말했다.

“시간이 완전히 멈춘 듯했어요.” 제스키에르는 캘리포니아에 머문 두 달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쿠즈에게 말리부에 집을 렌트하자고 제안했다. “내 삶에 그런 두 달은 다시 없을 거라고 느꼈어요.” 그들은 라코스타 비치에서 여름을 보냈다.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되었습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어요, 함께하려면 같은 집에 함께 있어야 했으니까요.” 둘은 서로에 대한 전념의 표시로 각자의 반려견(제스키에르는 두 마리, 쿠즈는 한 마리)을 한 가족으로 합쳤다.

25년 동안 제스키에르는 회사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사무실에 있지 않으면 죄책감이 들 정도였죠.” 그런 그가 놀랍게도 원격 근무에 적응했다. 매일 아침 파리와 영상회의를 하고 원단 상자가 말리부에 도착했다. 말리부 특유의 상상력 넘치는 스타일은 그의 디자인에 영향을 미쳤다. “드류는 문화적으로 캘리포니아의 영향을 매우 강하게 받았고, 내가 가본 적 없는 곳으로 나를 데려갑니다. 우리는 칼라바사스에서 그래피티를 보거나 정말 멋진 빈티지 서점에 가곤 하죠.” 파리에서는 영화를 보러 가지 않지만, 캘리포니아에서 그와 쿠즈는 항상 영화관에 간다. “로스앤젤레스에 오면 제가 달라진다고 말하진 않겠지만, 좀 더 자유로워지는 편이에요. 파리에서는 집이 곧 일의 연장이죠.”

하지만 쿠즈에게 파리는 놀라운 신세계였다. “파리 패션계는 내게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그 모든 순간을 즐겼죠.” 지금의 쿠즈는 아직 프랑스어보다 패션에 더 능숙하다. “우리는 집에서 영어를 쓰거든요.” 그가 변명하듯 말했다. 쿠즈는 2020년 12월 처음 파리에 도착했을 때 ‘온전히 자신의 직업적 성과에 근거해’ 거주 신청을 위한 전 직장 동료들의 추천서를 제출했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는 커뮤니케이션 컨설팅 회사를 설립했고(이전 경험을 살려 주로 의류 브랜드와 일하며 미국 대마초 회사와 일하고 있다), 어디든 걸어 다니는 파리의 삶에 빠르게 적응했다. “걷는 걸 정말 좋아해요. 어디든 언제나 걸어 다니죠.” 그런 면에서 남부 캘리포니아 출신에게는 진정 새로운 출발이다.

제스키에르는 다른 방식으로 캘리포니아에 매료되었다. 말리부에서 한 달 동안 집을 렌트한 후 그는 그 지역에 집을 사기로 결심했고, 선셋 플라자 근처에 건축가 존 로트너(John Lautner)가 설계한 1961년 석조 주택 ‘울프 레지던스’를 눈여겨봤다. 2014년 그는 컬렉션을 위한 무드보드에 그 건물 사진을 처음 포함시킨 후 거의 10년 동안 그 집을 멀리서 동경해왔다. 그리고 거의 1년이 지난 시점에 중개인이 다시 그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 집이 곧 부동산 시장에 매물로 나온다는 소식이었다. “파리에 있는 것도 중요했지만 드류가 온 캘리포니아에 집을 가지는 것도 중요했어요.” 제스키에르는 이렇게 설명했다. “일종의 헌신의 표현이었죠.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파리에서 보내지만, 캘리포니아에서 보내는 시간도 우리 관계에서 소중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국 서부 문화에 노출되는 것은 그의 작업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2022년 봄 크루즈 컬렉션을 위해 루이 비통은 라호야의 해안 절벽에 위치한 생물학 연구 캠퍼스인 소크 연구소(Salk Institute)의 시설을 사용했다. 이 연구소는 루이스 칸(Louis Kahn)이 설계한 곳으로, 제스키에르는 이 쇼를 가장 좋아하는 쇼 중 하나로 꼽았다. “사실은 절대 그 장소에서 쇼를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세상을 구하기 위해 일하고 있는 생물학자들에게 ‘안녕하세요, 전 패션 디자이너인데요!’ 뭐 이런 느낌이라서 말이죠. 그런데 그들이 허락한 거예요!” 캘리포니아인이 되는 경험 또한 럭셔리에 대한 생각을 바꿔놓았다. “캐주얼한 게 아니라 겉으로 보기에 세련되지 않은 모습에 극도의 세련미가 있습니다. 그것을 새롭고 세련돼 보이게 만드는 것은 혼합과 조합입니다. 그리고 난 남미와 아시아의 융합을 사랑해요.”

“그는 항상 이런 식으로 아이디어를 비틀어 변형시킵니다.” 소베가 말했다. “어떤 것에서 영감을 받고 그 아이디어를 다른 무언가로 비틀거나 완전히 반대되는 다른 아이디어와 교배하죠.” 발렌시아가에서 그는 18세기풍의 프릴 장식 톱을 짧은 스커트와 항아리 모양 테이퍼드 팬츠에 매치해 화려한 역사주의와 도시적 세련미가 결합된 역설을 구현해냈다. 루이 비통에서는 프록 코트와 운동화가 있었는데, 19세기와 1967년의 혼합은 완전히 진보적이었다. 봉쇄령 이후 캘리포니아는 그의 상상력의 실타래에 또 하나의 리본처럼 엮여 태평양 스타일의 세계가 다음 단계로 변형되고 뒤틀리는 시작점이 되었다.

10년 전 제스키에르는 모든 것을 걸고 모나코에서 그의 첫 크루즈 쇼를 선보였다. 몬테카를로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서 열렸고 올해 그는 아메리카컵 요트 경기를 앞두고 바르셀로나에서 쇼를 계획했다. “CEO 피에트로가 바르셀로나에서 아메리카컵 요트 경기 개최를 약속했어요.” 그가 회상했다. “그래서 ‘난 바르셀로나를 좋아해요. 그리고 정확하게 어디에서 쇼를 해야 할지도 알고 있어요’라고 말했죠.”

도심의 언덕 위에 있는 구엘 공원은 원래 스페인 건축가 가우디가 주거 단지로 계획한 곳이었다. 건설 과정에서 부지 용도가 공원으로 변경되었고 오늘날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방문객이 많은 관광지 중 하나가 되었다. 꽃과 야자수, 라벤더가 언덕을 따라 침대처럼 펼쳐지며 지중해 해안이 내려다보인다. 공원의 중심인 하이포스타일 룸(Hypostyle Room)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공터와 파티오 위로 알레포 소나무 숲이 드리워져 있다. 하이포스타일 룸은 모자이크 천장에 도리아 양식의 기둥이 세워진 파빌리온이다. 크루즈 쇼를 위해 루이 비통은 하루 동안 공원 전체를 빌려서 관광객의 출입을 막았다. 전례 없는 일이었고 공공장소의 일시적 점유로 도심에서 항의가 있기도 했다. 쇼 당일, 경찰과 경호원이 주변을 둘러싸고 출입증을 확인했다. 초대받은 셀럽들이 칵테일을 즐기기 위해 파티오로 향하는 길에는 흙색 카펫이 깔렸다. 런웨이가 될 하이포스타일 룸에는 가우디풍 곡선형 화이트 벤치가 설치되었다.

쇼 시작 몇 시간 전, 제스키에르는 부오노마노와 소베, 브로카우, 팀 멤버들과 함께 게스트를 위한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는 조금 당황한 상태였다. 그날 아침 침대에서 급하게 나오다가 발을 헛디뎠고, 넘어지지 않으려다 검지의 힘줄이 끊어졌다(며칠 뒤 로스앤젤레스에서 병원에 갔고 결국 ‘저지 핑거(손가락 굴곡근 박리)’ 진단을 받았다. 운동선수들이 도망치는 상대방의 유니폼을 잡으려다 쉽게 다치는 부위로, 그는 직물 무역에 몰두하는 자신에게 딱 어울리는 부상이라고 여겼다). 리허설을 알리는 음악이 시작되자 모델들은 각자 의상에 챙이 넓고 위가 납작한 모자와 슈즈를 착용하고 워킹을 시작했다. 모자는 제스키에르가 쇼장을 기념하는 의미로 추가한 솜브레로 코르도베스(Sombrero Cordobés)의 변형이었다.

그런데 그 모자는 재앙을 불러왔다. 따뜻하고 맑은 저녁이었지만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문제였다. 첫 번째 모델이 런웨이 코너를 돌았을 때, 세찬 바람에 휙 뒤집어져 핀 한두 개에 매달린 채 모델 머리에서 달랑거리는 모자는 캔 뚜껑 손잡이처럼 보였다. 깜짝 놀란 제스키에르가 부오노마노와 소베에게 “모자!”라고 소리쳤고 리허설이 계속되는 동안 그들은 벤치에 모여 앉아 방안을 논의했다.

몇 분 후 게스트들이 공원에 몰려들기 직전의 긴박한 순간에 부오노마노와 헤어 스타일리스트 더피(Duffy)는 다양한 드레스를 입은 모델과 메이크업 용품으로 가득한 임시 텐트로 가서 모자 작업에 돌입했다. 문제는 모든 모델의 헤어스타일이 각기 다르다는 것이었다. 길거나 짧거나 구불거리거나 가느다랬다. 어떤 모델의 모자는 머리에 실로 바느질해야 했다. 또 다른 모델은 에펠탑처럼 보일 정도로 많은 핀을 꽂았다.

“모자는 쇼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상징입니다. 매우 강한 포인트죠. 모자와 선글라스를 쓴 모습은 그림 같아요.” 부오노마노가 말했다. “니콜라에게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말라고 했어요. 지난해 서울 쇼 기억하지?” 잠수교에서 열린 쇼에서 모델들은 가발을 썼고 강풍 같은 겨울바람이 부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바닥에 떨어진 가발이 하나도 없었어요. 나를 믿어요, 모자는 절대 벗겨지지 않을 겁니다.”

게스트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두버네이와 코넬리, 클로이 모레츠, 소피 터너와 인디 밴드 하임 같은 제스키에르의 할리우드 지지자들이었다. 그동안 공원의 동굴 같은 아케이드 한 곳에서 모델들은 사진을 찍고 있었다. “돌아보세요! 계속요!” 디렉터가 외쳤다. “실루엣 말고요. 자, 마지막이에요! 아름다워! 좋아요!”

저녁 8시 45분, 게스트들이 자리를 잡자 쇼가 시작됐다. 오프닝 모델이 게리 누만(Gary Numan)의 ‘Music for Chameleons’에 맞춰 등장했다. 단단하게 고정된 모자에 선글라스를 썼고, 말쑥한 튜닉에는 제스키에르 특유의 루이 비통 V자 형태 칼라가 달려 있다. 그다음 등장한 모델은 베이지색 모자에 베이지색 재킷, 베이지색 피펫 팬츠로 통일한 채 제스키에르의 서프라이즈 선물 같은 무지갯빛을 띠는 오팔 부츠를 신고 걸어 나왔다.

제스키에르는 런웨이에서 아이디어를 반복해서 발전시키는 방식으로 유명하다. 각각의 실루엣은 작은 시퀀스로 발전한다. “때로는 하나의 쇼에서 시작한 아이디어가 또 다른 쇼로 이어지며 계속 발전하는 걸 보기도 합니다.” 두버네이가 말했다.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이기도 하죠. 캐릭터들이 하나씩 등장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겁니다.” 컬렉션은 처음 의상 몇 벌로 시작해 그가 10년 전 정립한 실루엣을 기반으로 레이어링, 플리츠, 드레이프 등 눈부신 원단과 처리 방식을 통해 발전해나간다.

그러고 나서 서서히 새로운 흐름이 등장하며 제스키에르의 서부 해안에서의 삶의 윤곽을 그려나갔다. 드레스는 카프탄 같은 형태를 띠기 시작하고, 루이 비통 실루엣으로 재해석된 후디는 넓은 어깨에 바깥쪽으로 확장된 후드를 보여준다. 의상이 암시하는 것은 절충적이면서도 정확하다. 결국 캘리포니아는 스페인 정복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며 스타일에서 바르셀로나와 소크 연구소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가깝다(“내게 바르셀로나는 생활 방식 면에서 유럽에서 가장 캘리포니아스러운 도시죠.”). 쇼가 끝나고 박수갈채가 쏟아지는 가운데 블랙 스웨트셔츠와 작업용 블랙 팬츠에, 블랙 나이키를 신은 제스키에르가 런웨이로 뛰어나와 게스트들에게 윙크했다.

그는 그날 밤, 루이 비통 애프터 파티에 자정이 넘어서 도착했다. 파티는 1970년대 빌라 에스파이 사비에르 코르베로(Espai Xavier Corberó)에서 열렸으며 동명의 카탈루냐 출신 아티스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곳이다. 모더니즘 양식의 폐허처럼 보이는 이 장소는 개방적이고 낮은 구조다. 음식을 나르는 이들은 안뜰을 가로질러 작은 접시에 담긴 파에야와 구운 감자 콘, 이베리코 햄 크로켓, 토마토 샌드위치, 세비체를 날랐으며 밤이 되자 녹차 쇼트케이크, 레몬 머랭, 크림 퍼프, 드라이아이스에 세팅한 과일이 나왔다. 게스트들은 거대한 벙커 아래 연기로 가득한 붉은 조명의 디스코장에서 춤을 췄다. 거의 새벽 1시가 되어가자 쿠즈와 함께 도착한 제스키에르가 무리를 지나 VIP 룸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지중해에 정박된 보트에서 긴 저녁 식사를 즐겼다. “모자가 떨어지지 않았어요!” 그가 자리에 앉으며 게스트 중 한 명에게 놀랍다는 듯이 외쳤다. “항상 그런 게 있잖아요, 아무리 준비를 잘해도 결국 자연의 지배를 받기 마련인 것들. 정말 멋졌어.”

몇 주 뒤 파리 리츠 호텔의 F. 스콧 피츠제럴드 스위트에서 제스키에르를 다시 만났다. 그와 쿠즈는 파리 아파트의 대규모 리노베이션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그곳에 머물고 있었다. “새로 다가올 것들을 위해 공간을 마련해야 했어요.” 그는 앞에 놓인 18세기 스타일의 금박 커피 테이블 위에 커다란 에스프레소 잔을 내려놓았다. 1시간이 흐르는 동안 두 번째로 들이켜는 커피였으며 삶만큼이나 자신의 일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 스위트룸에서 눈에 띄는 특징은 모든 것이 금색이라는 것이었다. 금색 실크 자카드 벽지, 금색 꽃병, 금색 장식품, 금색 액자, 금색 러그. 제스키에르는 파리와 럭셔리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쿠즈와 함께 바르셀로나 쇼 다음 날 황금빛 캘리포니아로 떠나 소중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드류의 40번째 생일이었고 내게는 매우 중요한 날이니까요. 우리는 샌디에이고로 가서 그의 친구들과 어머니, 양아버지를 만나며 오랜 시간을 보냈어요. 그리고 몇 가지 조사도 시작했죠.” 그가 부끄러워하며 덧붙였다. “2025년 여름을 위해서요.”

제스키에르에게 조사란 보통 아이디어 목록을 만들고, 갤러리와 빈티지 숍을 돌아다니며 스케치를 시작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수집한 자료가 컬렉션이 되는 과정은 간접적이며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 “니콜라는 영감을 찾지 않아요, 항상 영감이 그를 찾아옵니다.” 쿠즈가 말했다. “나만 포착할 수 있는 어떤 것을 탐색하는 겁니다. 우연히 발견한 매우 아름다운 것들이요.” 제스키에르는 설명했다. “맥락에서 완전히 벗어난 곳에서 발견했지만, 하우스의 스토리와 맞아떨어지죠.”

현재 제스키에르는 루이 비통 이후의 삶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그가 말한 가장 구체적인 계획은 영화 의상 디자인을 하고 싶다는 것 정도다. 그리고 세상이 그에게 아이디어를 주는 한 은퇴 계획도 없다. “매일 아침 일어나 ‘펜을 가져다줘!’라고 외치는 건 아니에요.” 그가 말했다. 하지만 창의적인 표현에 대한 충동은 늘 존재하며 아이디어는 여전히 넘쳐흐른다. 샌디에이고에서 생일을 축하하며 시간을 보낼 때도 말이다.

“드류의 양아버지는 샌디에이고 항공우주박물관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제스키에르가 말했다. “아침에 박물관에 가서 함께 점심을 먹고, 오후에 다시 와도 될지 물어봤죠.” 그가 우주 캡슐과 제트기를 구경하는 동안 밝은 색상과 날렵함, 여행, 속도 등 그의 마음속에 무언가가 번뜩였다. “‘와, 이거 완전 루이 비통이잖아!’라고 생각했어요.” 박물관에서 1만 마일 떨어진 파리의 실크 벽지를 훑어보며 그가 덧붙였다. “2025년 여름 컬렉션에 포함되진 않지만 기억해둘 만한 좋은 자료임엔 분명합니다.” (VK)

Читайте на 123ru.net